말씀/설교

성도의 이전과 이후, 에베소서 2장 1절-10절

아카이브 주인장 2025. 4. 3. 21:00


구원받기 이전의 우리

하나님과의 단절된 상태

구원받기 이전의 우리는 하나님과 단절된 존재였습니다. 죄와 타락으로 인해 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상태였습니다. 이 죽음은 생명과의 단절,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 모두를 향해 성경은 '죽었다'고 선언합니다.

세상 풍조와 마귀의 지배

구원받기 이전의 우리는 세상 풍조를 따라 살았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이들은 여전히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삶은 그럴싸해 보이더라도 그 뒤에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즉 마귀가 자리하고 있고 그 죄의 종노릇을 하게 됩니다. 죄와 불순종에는 악한 영이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흔히 하는 실수는 마귀를 너무 과소평가하거나 과대평가하는 것입니다. 이 양 극단은 옳지 않습니다. 그 마귀를 무시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마귀는 항상 우리를 무너뜨리려 애쓰기에 우리는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으로 대적하여 무찔러야 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상태로 우리는 육체의 욕심과 정욕에 사로잡혀 살아갔습니다. 그 결과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되었다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진노는 실제라는 점입니다. 사도 바울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 진노를 강조했습니다. 구원받기 전,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이 진노가 임하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그것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이야기하기 전에, 하나님의 진노의 자리를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이야기는 거기서 출발하게 됩니다. 구원받은 존재는 내가 어떤 존재였는지, 본질상 진노의 자녀임을 처절히 깨닫게 됩니다. 성도는 이를 잊지 않는 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역사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우리는 원래 진노 앞에 서있던 존재였고, 아무 가능성이 없어서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어떻게 할지 몰랐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가 펼쳐집니다. 에베소서 2장 4절에는 헬라어로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그러나의 은혜"입니다.

 

여전히 마귀의 종노릇 당하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 때에 문장의 주어가 바뀝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인하여"라고 말입니다. 가장 먼저 우리는 그 자리에 하나님의 긍휼이 자리잡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긍휼하신 하나님이 진노의 자녀인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긍휼의 원 뜻은 '함께 고통받는다'는 것입니다. 멸망하게 될 우리를 보시면서 하나님은 아파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럴 의무가 없으셨지만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 마음이 우리의 구원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상식과 지혜를 넘어섭니다. 일반적으로 사랑은 "무엇 때문에", "무엇 한다면" 사랑하는 조건부 사랑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이와 차원을 달리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할 조건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긍휼히 여기심에 나를 불쌍히 여기셨고 나의 죄를 담당해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죄가 별것 아니거나 우리의 회개가 훌륭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사랑하심이 워낙 컸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새 생명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고, 일으키시고, 안치시는 분임을 주목해야 합니다. 성도는 이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는 것과 하나님과 운명을 함께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살았고, 일어났고, 하늘에 있게 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구원 사건으로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변화된 것입니다. 정말 엄청난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은혜의 나타남을 위한 구원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를 주신 이유는 다른 여러 세대에 간증이 되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 드러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의 이유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모습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멋진 간증을 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 은혜를 우리에게 먼저 주신 이유는 나타내라는 사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나의 가문이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고 계승하는 축복된 가문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 선한 일을 꿈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를 알리기 위해 부름 받은 존재이며, 그것이 우리가 성도이고 교회의 공동체인 이유입니다.

은혜로 얻는 구원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구원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에는 우리의 어떤 행위와 공로가 완전히 배제됩니다. 은혜는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냥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단지 거저 주어지는 것이라는 이유로 값싸게 여기면 안 됩니다. 본헤퍼 목사님은 이를 비판하며, 은혜를 값싸게 생각하는 것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을 가볍게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사실 구원이 공짜가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그 구원의 은혜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피 흘리게 하신, 대가가 치러진 일입니다. 우리 구원의 대가는 어떤 것으로도 그 가치를 대신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로 구원의 은혜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긍휼과 사랑이라는 당신의 성품으로 우리, 본질상 진노의 자녀를 위해서 행동하셨습니다. 진노가 예정된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구원의 시작과 마지막을 모두 책임지셨고 우리는 이를 은혜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이기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새로운 창조물로서의 사명

선한 일을 위해 지음받은 우리

오늘 우리 인생의 가치는 우리가 하는 일이나 다른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귀하고 가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 만들어진 구원의 작품이라는 데 있습니다. 원래 진노의 자녀였지만 새로운 피조물로 지어진 작품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 구원의 손길로 빚어진 작품이기에 우리에겐 자긍심이 충분히 있을 만합니다.

 

행위는 구원받은 자의 표시입니다. 행위로 구원받지는 않지만 구원을 증명합니다. 행위를 내세워서는 절대 안 되며, 이는 구원이 아닙니다. 그러나 행위로 증명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며, 이것은 가짜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냄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선한 일이고 선한 행위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구원을 허락하신 우리를 향한 기대와 목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무엇 때문에 애를 쓰며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에겐 분명히 하나님의 목적이 남아있습니다. 이 땅에 아직 내가 살아가고 있다면 하나님의 꿈과 사명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이전과 이후의 경계를 나누는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역사입니다.

 

진노의 자리에서 출발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후 우리는 그분이 지으신 목적대로 선한 일을 이루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을 선물하신 하나님의 정확한 의도입니다.

 

성경은 2절과 10절에 '페리파테오'라고 하는 동일한 헬라어 단어를 사용합니다. 둘 다 '사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 내용은 천지차이입니다. 죄 가운데 살다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선한 일에 열심인 그리스도인이 되어, 구원 이전과 이후가 분명히 다른 명백한 성도의 삶을 살아갑시다.